캘거리의 크리스티앙 부드로는 축구 연습, 그녀의 직업인 회계 업무, 이웃들과의 포트럭 모임 사이사이의 남는 시간 내내 코를 모니터에 대다시피 하고 IS 영상을 본다.
그녀는 중산층들이 사는 교외에 있는 중산층 주택에 산다. 한때 장남 다미앙이 썼던 지하실의 휑한 방에 앉아 그녀는 남자들이 큰 총을 들고 십대들처럼 포즈를 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총격전도 지켜보았다. 처형 장면도 보았다. 그러나 유혈 사태는 부드로의 눈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바라클라바 뒤의 얼굴들에 집중하며, 아들의 눈을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코펜하겐의 카롤리나 담은 공포에 제정신이 아니다. 그녀의 아들 루카스는 7개월 째 시리아에 있었다. 사흘 전 그녀는 그가 알레포 외곽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말을 전해들었지만, 그녀는 루카스가 죽었을 거라 믿고 있다. 그날 저녁 혼자 앉아 초조하게 전자 담배를 빨며, 그녀는 참지 못하고 허공에 바이버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루카스,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그립고 너를 안고 냄새 맡고 싶어. 네 부드러운 두 손을 잡고 네게 미소짓고 싶어.”
답은 없었다. 한 달 뒤, 누군가 그녀에게 답장했다. 루카스는 아니었다.
"내 손은 어때 헤헤"
담은 누가 자기 아들의 전화나 바이버 계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정보를 얻고 싶어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차분함을 지키려고 애쓰며 답장을 보냈다. “당신 손도, 스위티. 하지만 루카스 손을 잡고 싶어요.”
그 사람이 물었다. “뉴스를 감당할 수 있겠어요?”
“네, 허니.” 담이 보냈다. 몇 초 후 답이 왔다.
“당신 아들은 산산조각 났어.”
노르웨이의 토릴은 자기 성은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자기 아들 톰 알렉산더를 모병해 시리아로 전투하러 보낸 사람으로부터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증거를 원했기 때문에 그녀의 딸들 사빈과 사라(가명)가 오슬로 기차역에서 그 모병 담당자를 만났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이패드의 사진들을 넘기며 그들에게 보여줄 사진을 찾았다. 머리에 총을 맞은 톰 알렉산더의 사진이었다. 안구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 소식을 듣자 토릴은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샤워를 할 힘을 짜냈을 때, 그녀는 옷을 벗고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꽃병이 깨지듯 조각이 나 있었어요.”
브뤼셀의 살리하 벤 알리는 모로코와 튀니지계 이민자 부모 밑에서 유럽에서 태어난 현대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인도적 구호 컨퍼런스에 참석했다가 뱃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종류의 고통은 몇 년 동안 느껴본 적이 없었다. “뱃속에 있는 아기가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일찍 귀가해 밤새 울었다.
이 여성들은 IS 또는 ISIS로 알려진 집단에게 아이를 잃은 4천명 중 네 명에 불과하다. 4년 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이래, 외국 국적을 가진 약 2만명의 사람들이 다양한 극단적 이슬람교 파벌에 가담해 싸우려고 시리아와 이라크로 갔다. 서구 국가에서 간 사람이 3천명이 넘는다.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떠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정상적인 감각을 완전히 잃은 채 몰래 떠났다. 그들이 가고 난 뒤, 부모들은 이 특수한 경우에 따르는 아주 비현실적인 비탄에 빠졌다. 자녀를 잃은 슬픔, 자녀가 저지를지 모르는 일들에 대한 죄책감, 적대적인 친구와 이웃들의 앞에서 느끼는 수치, 자신들이 이 세상에 데려온 사람에 대해 몰랐던 것들을 깨달으며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한 의문. 지난 한 해 동안, 전세계의 이런 어머니들 수십 명이 서로 연락을 하며 그들의 상실로 인한 묘한 연대를 맺었다. 그들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들에 일어난 일의 무의미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죽음에서 뭔가 의미있는 것이 나오는 것.
나는 4월에 크리스티앙 부드로를 만나러 캘거리에 갔다. 그녀는 다미앙이 이슬람교를 알게 되어 자신이 얼마나 희망을 가졌는지 이야기했다. 46세의 부드로는 아직도 얼핏 소녀스럽다. 코가 가늘고, 꼼꼼히 살피는 듯한 밝은 갈색 눈을 지녔다. 그녀의 첫 남편은 다미앙이 열 살 때 가족을 떠났고, 다미앙은 자신을 화나게 하고 배제하는 세상에서 후퇴해 컴퓨터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17살 때 부동액을 마셔 자살을 기도했다.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어 다미앙은 어머니에게 코란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부드로는 다미앙을 크리스천으로 키웠지만, 그녀는 그의 개종을 환영했다. 그는 취업을 하고 더 사교적이 되었다. “[이슬람교는] 다미앙을 안정시키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어요.” 그녀가 회상한다. 그러나 2011년에 부드로는 아들이 변한 것을 느꼈다. 다미앙이 찾아왔을 때 새 친구들이 전화를 하면 그는 언제나 밖에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테이블에 와인이 있으면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여성들은 반드시 남성들의 돌봄을 받아야 하며, 아내를 하나 이상 두는 것도 용인된다고 말했다. 그는 정당한 살해 이야기를 했다. 2012년 여름, 그는 새로운 무슬림 친구들과 함께 그들이 모두 기도하는 캘거리 다운타운의 모스크 바로 위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는 체육관에 정기적으로 다니기 시작했고, 룸메이트들과 함께 도시 주위의 황야로 하이킹을 갔다. 그때 시리아의 분쟁은 초기 단계였고, 부드로는 자주 문제를 겪는 자신의 아들이 다른 시기를 겪고 있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미앙이 그 시기를 벗어나길 바랐다. 11월에 다미앙은 이집트에 가서 아랍어를 공부하고 이맘(주: 이슬람교 성직자)이 되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하고 캐나다를 떠났다. 그는 곧 연락이 두절되어 부드로를 괴롭게 했다.
2013년 1월 23일, 부드로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픈 허리를 돌보고 있었는데 두 남성이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캐나다 정보국 요원들이라고 했다. 다미앙은 이집트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룸메이트들과 함께 시리아로 가서 알 카에다 지부인 자밧 알 누스라에 가담했다. 요원들이 가고 났을 때 부드로는 “몸이 아팠다”고 한다. 그 뒤로 며칠, 몇 주 동안, 그녀는 지하디스트 웹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아들을 찾을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정말 메스껍고 뒤틀린 일 아니에요?” 그녀가 말한다.
시리아의 과격 조직에 가담하려고 도망가는 젊은이들 대부분은 탁피르를 한다. 즉, 그들의 지하드에 걸림돌이 되는 부모를 포함한 모든 이교도들과 절연하는 것이다. 그러나 2월부터 다미앙은 이틀, 사흘마다 한 번씩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로 경비를 설 때였다. “배경 잡음이 다 들렸어요. 사람들이 아랍어로 서로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한 번은 다미앙은 비행기들이 낮게 날고 있는데, 그건 폭탄을 투하할 거라는 의미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부드로와 통화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 다미앙은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때 조심스럽고, 그녀는 그가 거기서 하는 일이 뭔지 지금도 잘 모른다.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가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은 8월이었다. 다미앙은 새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부드로에게 연락했다. 그들의 대화를 보면 그녀는 머뭇거리며 애원한다. 다미앙은 정중하고 잘난 척하며 극도로 사춘기적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도 널 아주 많이 그리워 하고 아주 많이 사랑해
네가 우리 모두를 떠나고, 네 스스로 위험한 곳에 가 있는 동안 우리가 매일 네가 괜찮은지 걱정하게 한 것 때문에 모두 아직 마음이 아파. 엄마는 아이가 마음 아파하는 걸 보면 내 마음이 아픈 것만큼이나 정말 정말 힘들단다……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한다, 너를 안지 못한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어. 넌 엄마가 될 일이 없으니 이해 못 할 것 같구나.
다미앙은 그 날 오후에 답을 보냈다. 그는 잘 먹고 있으며, 아랍어를 숙달했으며 아내와 집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하며, 이런 것들이 그녀가 주목해야 할 일들이라고 말했다.
나도 모두 보고 싶지만,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 신앙, 의도, 현재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날 걱정하고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새로운 정보가 아니에요.
2014년 1월 14일, 기자 한 명이 부드로에게 전화를 걸어 다미앙이 알레포 외곽의 하리탄에서 자유시리아군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트윗이 있다고 알렸다. 그녀 주위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그녀는 한 가지 분명한 과제에 매달렸다. 뤼크가 TV에서 보기 전에 알려줘야 했다. 그녀는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되도록 뤼크를 심리학자 사무실에 데리고 갔다.
1월 30일 깊은 밤에 뤼크는 페이스북 스레드에 마지막 메시지를 올렸다.
형이 보고 싶고 형이 살해 당하지 않았더라면 좋겠어.
다미앙이 죽은 후, 부드로는 언제나 정신을 잃기 직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내내 울었고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을 감기만 하면 너무 조용했어요.” 그녀는 뤼크, 다미안의 이부 여동생 호프, 양녀 페이지를 위해 정신을 추스려야 했지만 그녀는 “너무나 외롭고 어두운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것을 아는 듯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다미앙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부드로는 다니엘 쾰러와 연락하기 시작했다. 베를린에 있는 급진주의 포기 전문가 쾰러는 네오 나치 운동을 그만두도록 돕는 일에 집중해 왔지만, 무슬림 극단주의자들과 그 가족들을 돕는 일도 몇 년 전에 시작했다. 다미앙의 죽음 이후 쾰러는 부드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아들에게 일어난 일을 그녀가 이해하는 것을 도우려 애쓰고 있다.
쾰러의 말에 의하면 부드로가 목격한 것은 전형적인 과격화 과정이라고 한다. 종교적 극단주의자 종파에 가입할 때나 네오 나치 집단에 가입할 때 거치는 단계들은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첫째, 새로 모집된 사람은 마침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에 엄청난 행복에 도취된다. 그는 주위 사람들을 개종시키려 노력한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의 과격화된 무슬림들의 경우, 시리아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게 하려 한다. 두 번째, 개종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좌절의 단계가 온다. 이때 가족 내의 갈등이 시작된다. 옷, 알코올, 음악을 놓고 다툼을 벌인다. 이 시점에서 개종자는 자신과 같은 집단 사람들의 충고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즉 자신의 믿음에 충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집을 떠나 무슬림 국가로 가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 단계에서 개종자는 가진 물건을 팔고, 체력을 키우거나 무술 훈련을 받는 경우가 많다. 좌절감이 쌓일수록 행동하고 싶다는 욕망은 강력해지고, 결국 폭력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게 된다.
다미앙이 죽은지 6개월 뒤 부드로는 베를린의 쾰러를 찾아갔고, 그는 시리아의 급진주의 집단에 가담했다 죽은 젊은이들의 어머니 세 명을 소개해주었다. 그들은 모두 사진 앨범을 가져왔고, 자기 아들들의 기억을 공유했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과격화된 이야기에서 비슷한 점들을 발견했다. 부드로는 한 여성의 아들은 다미앙과 같은 마을에서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어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부드로는 “마침내 이 검은 구름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쾰러는 이 여성들이 “그들을 쓰러뜨린 것은 이 우주에서 단 한 명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했다고 내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부드로는 행동주의에 투신했다. 자기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 가능한 일이라면 다른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쾰러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급진화된 젊은이들의 부모를 돕기 위한 두 개의 조직을 세웠다. 하야트 캐나다(Hayat Canada)와 마더스 포 라이프(Mothers for Life)다. 그녀는 캐나다 전역을 돌아다니며 친구와 친척 중에서 급진주의의 징후를 발견하고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교사들, 학생들, 경찰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미디어에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교육하지 않고 있어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마약, 섹스, 알코올, 친구 사이의 괴롭힘에 대해 교육하죠. 다른 모든 주제에 대해 교육하고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만, 여기에 대해선 교육하지 않고 있어요.” 부드로는 나와 함께 그녀의 부엌에 앉아 이야기한다. 흡연자인 그녀의 쉰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진다.
쾰러는 젊은 급진주의자들에게 접근해 교화를 시작하게 만드는데 보통 두 집단이 적합하다고 말한다. 예전에 급진주의자였던 사람들, 그리고 어머니들이다. “어머니는 지하디스트 이슬람에서 극히 중요하다. 무함마드는 ‘천국은 어머니들의 발치에 있다’고 말했다. 계속 지하드를 해도 될지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거나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의 설명이다. 그는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스카이프 통화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전사들을 상대해 봤다고 한다. 작별 인사를 하거나, 천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어머니를 개종시키기 위해서였다. 국경 없는 여성들(Women Without Borders)이라는 오스트리아 NGO는 이슬람 극단주의에 시달리는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에 ‘어머니 학교’를 설립하고 있다. 어머니들에게 아이들이 급진화되는 것을 막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다. 이 NGO는 지금 유럽에 어머니 학교 다섯 곳을 추가로 세우고 있다.
그리고 예외가 없진 않지만,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머니들이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다미앙 같은 어린이의 가족들에는 아버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서방 국가로 이주한 무슬림 이민자 가정에서 아버지들은 존재하되 관여하지 않는 경우가 잦다. EU 정책협의회인 급진화 의식 네트워크의 공동 회장인 스웨덴의 전문가 마그누스 란스토르프는 무슬림 남성들은 서방 사회에서 거세되는 느낌을 받고 뒤로 사라지는 일이 많다고 한다. “어머니가 구심점이다.” 그의 말이다.
내가 이야기를 나눈 전문가들은 또한 자녀를 지하디스트 운동에 잃은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은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비탄에 반응한다고 했다. 아버지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에 틀어박히는 비율이 높다. 자신들의 양육에 어떤 식으로든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을 외부인들에게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어머니들은 그 반대다. 그들은 무척이나 남들과 슬픔을 나누고 싶어하고, 그들의 아이가 살았던 세상에 빠져들어 보고 싶어 하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 노력한다. 이것은 불가해한 것에 대한 통제를 아주 조금이라도 얻는 그들의 방식이다. “어머니들은 완전히 몰두한다.” 쾰러의 말이다.
내가 찾아갔을 때 부드로는 나를 그 지역 가톨릭 고등학교에 데리고 갔다. 학생들은 대부분 난민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신이 다미앙에 대해 만든 영상 을 보여주었다. 그 영상의 마지막에서는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자신의 죽은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부드로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 넌 무서웠니? 내가 네 손을 잡아주길 바랐니?” 그리고 더 차분한, 거의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다. “이 모든 게 신이랑 무슨 상관이 있었니?”
강당에는 불이 다시 켜졌고, 충격을 받은 학생들은 조용했다. 무대에 오르기 전 부드로는 잠시 마음을 추스렸다. 수없이 본 영상이었지만 그녀는 어둠 속에서 울고 있었다. 수십 번이나 프리젠테이션을 했던 그녀는 학생들의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했다.
2월에 부드로는 덴마크의 카롤리나 담이라는 여성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당신 프로젝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나도 아들을 잃었어요. 시리아에서 살해 당했고, 같은 일을 겪은 다른 어머니들과 연락을 하고 싶어요.” 올해 5월, 나는 코펜하겐 노동자 계급이 사는 지역에 있는 담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얼굴이 둥글고 헝클어진 구릿빛 머리를 한 담은 나를 해가 잘 드는 부엌으로 안내했다. 부엌 안은 세심하게 보라색과 흰색으로 데코레이션되어 있었고, 천과 플라스틱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는 커피 주전자와 방금 직접 구운 빵을 내주고 자기 아들 루카스에 대해 전부 이야기했다. 그녀는 거의 언제나 ‘내 아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루카스는 내향적인 아이였고, 그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충돌로 귀결되는 일이 많았다. 10살 때 아스퍼거 증후군과 주의력 결핍 장애 진단을 받았지만, 사춘기가 되자 그의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훔친 스쿠터를 몰다 잡혔고, 친구 어머니의 약혼 반지를 훔쳤다. 담은 루카스가 갱에 가담한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그때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났다. 루카스는 직원들 대부분이 무슬림인 동네 차량 정비소에서 견습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들은 루카스를 받아들이고 자기 종교를 소개해주었다. 담은 몇 달 뒤에야 루카스가 개종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루카스가 낮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라마단을 지키는 중이었다.
부드로처럼 담은 처음에는 아들의 개종이 “작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다가가기 힘들던 그녀의 아들이 마침내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부드로와 마찬가지로 담은 자기가 음악을 틀자 루카스가 짜증을 냈던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어느 날 루카스가 담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천국에서 만날 수 없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울면서 집에 왔던 이유도 이해하지 못했다.
루카스는 완전히 변신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화를 자주 냈다. 그는 주먹으로 쳐서 자기 방 벽에 구멍을 내곤 했다. 루카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겁이 난 담은 사회복지사들에게 상담을 받고 루카스를 입원시켰으나 그는 도망갔다. 그는 다른 이슬람교도 셋과 함께 코펜하겐 주위의 아파트들을 전전하며 살기 시작했다. 세 명 모두 그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이었다. 담은 실종 신고를 했지만, 루카스가 매일 집에 전화를 했기 때문에 경찰은 엄밀히 말해 그가 실종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루카스가 집에 돌아오자 담은 그녀를 다시 입원시키기로 했고, 루카스의 물건들을 챙기다 침대 밑에서 방탄 조끼를 발견했다. 그때 루카스는 겨우 15살이었다.
2014년 5월 루카스는 만 18세가 되자마자 사라졌다. 며칠 후 그는 터키 국경에서 담에게 전화를 걸어 휴가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난 겁이 났어요. 걘 아직 애인데, 아직 약한데, 아직 남들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아인데. 그리고 작별 인사도 없이 혼자 거기까지 갔다는 게 정말 무섭잖아요! 아들이 어머니한테 작별 인사를 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거예요.”
루카스는 떠난 뒤 몇 달 동안은 지속적으로 연락을 했다. “그는 나를 놓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루카스는 담에게 자기가 터키 난민 캠프에서 일하며 옷을 포장하고 물을 나르고 음식을 준비한다고 했다. 하지만 루카스를 비롯한 덴마크 지하디스트들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덴마크 언론인 야콥 셰이크에 의하면 그는 결국 시리아로 건너가 이드리브 주의 이슬람교도 분파 아라르 알 샴에 가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보면 루카스는 마치 집을 그리워하는 대학 신입생 같다. “다시 전화해 주세요.” 루카스는 8월 15일에 담에게 이렇게 적었다. “많이 사랑해요, 하나뿐인 엄마.” 담은 메시지에 이모티콘을 섞어 가며 이렇게 답했다. “네가 어디에 있든 많은 키스를 보낸다.” 그는 고양이 안부를 묻는다. 담은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녹음한 파일을 보낸다. 그녀는 그의 은행 계좌에 돈을 더 넣어줄지 묻는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카드를 넘기지 않았는지 확인할 목적도 있었다. 이 시기에 시리아에서 찍은 루카스의 사진에서, 루카스는 기도를 하려고 막 씻은 뒤이다. 얼굴과 머리는 아직 젖어 있다. 행복해 보인다.
9월 말 루카스는 조용했다. 담은 몰랐지만, 그 무렵 아라르 알 샴의 지도자가 ISIS의 공격으로 암살당했고, 이어진 카오스 속에서 루카스는 IS에 가담했다. 그가 두 달 뒤 다시 연락해 왔을 때, 담은 바이버로 채팅하며 집으로 돌아오도록 꾀려고 해보았다. 담은 루카스에게 침실을 다시 꾸몄다고 말했다. 주먹 크기 구멍들에 회반죽을 바르고 페인트칠을 새로 했으며, 그가 덴마크로 돌아올 비행기 표 살 돈을 따로 떼 놓았다고 했다.
담이 루카스를 압박했다. “집에 언제 오는지 나한테 말해야 돼.”
“나도 몰라서 말 못 해줘요!”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다. 2014년 12월 28일 밤, 루카스의 코펜하겐의 무슬림 친구 아드난 아브딕이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계단이 네 단 밖에 안 되는데 도무지 올라오질 못하더라고요. 복도에서 계속 말을 더듬고 있어서, 내가 집안으로 끌고 들어왔어요. 그는 울고 있었고, 내 눈을 보질 못했어요.” 담이 회상한다. 겁이 난 담은 스스로를 지켜야 할 경우에 대비해 칼을 찾기 시작했다. “난 걔한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목을 잡았어요.” 아브딕은 루카스가 다쳤다고 불쑥 말했다. “바로 그때, 그 순간에 난 루카스가 죽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 날 밤, 아브딕은 돌아가고 나서 담에게 개인 페이스북 그룹의 링크를 보냈다. 담이 가입 신청을 했더니 즉각 승인되었다. 담은 루카스가 옆에 AK-47을 놓고 바닥에 앉아 있는 사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다. 배경의 벽에는 ISIS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다른 포스트들을 보는 동안 영상들이 자동 재생되기 시작했다. “나는 참수, 강간, 학살 같은 빌어먹을 영상들을 보고 있어요. 혹시라도 내 아들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나 싶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샤히드의 죽음을 묘사한 페이스북 포스트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게 루카스의 무슬림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라가 우리의 개종한 덴마크 형제를 받아주시기를, 샤히드라 이름 붙고 슈하다 사이에서 샤히드라 불린 그를 알라와 재결합시키시기를.” 담은 너무나 무서워 아무것도 포스팅할 수 없었지만 마침내 이렇게 적었다.
이건 내 아들이에요, 죽었나요?
나한테 연락해요, 말해줘요!!!!
아부 압둘 말릭이라는 남성이 곧 대답했다.
카롤리나 담, 당신, 그리고 어떻게 당신에게 소식을 알릴지 하는 것은 이 형제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들 중 하나였어요
신도든 아니든 이 소식은 어머니에겐 힘들 수 있지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특별하니까요, 그리고 소식이 늦어진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였어요…… 알라가 어머니를 이끌어주시기를 그리고 알라가 우리 형제를 받아주시기를
담은 질문들의 고문을 받았다. 그녀의 아들이 시리아에서 정말로 하고 있던 일이 무엇일까? 대체 거기까지는 어떻게 갔을까? 무엇보다, 사회성 없고 어색하게 행동하는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자기 삶의 그토록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서 교묘하게 숨겨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녀는 그 상처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그 뒤 그녀는 다른 전사들 수십 명에게 접근했다. 루카스와 접촉이 있었을 것 같은 사람들을 찾아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녀의 탐색에는 실용적인 이유도 일부 있었다. 담에겐 아들의 죽음을 증명할 것이 없고, 증거가 없다면 5년을 기다려야 사망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나한테는 빌어먹을 페이스북 상태 하나가 전부예요!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그녀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싶다. 담은 지하디스트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정보를 이끌어 내는 테크닉을 발달시켰다고 하다. “다른 의도가 있다 해도, 엄마 역할을 해야 해요.” 그녀는 그들에게 식사할 시간이라고 일깨워주고, 스위티라고 부르고, 무례하게 행동하면 야단친다.
담은 스크린을 돌려 내게 루카스의 다른 코펜하겐 친구 사진을 보여준다. 그녀는 아지즈(가명)가 시리아에 있다고 믿는다. 그를 통해 그녀는 루카스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지즈는 루카스가 녹음한 오디오 파일을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루카스는 아지즈에게 합류하라고 이야기했다(오디오 파일을 보내는 것은 전사들이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전화 통화와는 달리 도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담은 파일 몇 개를 내게 들려주었다. 뒤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루카스는 웃으며 친구에게 ‘아름다운 분위기’ 이야기를 한다. 다른 파일에서는 불안한 목소리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살해당하고 있어. 닭처럼, 동물처럼 도살당한다고.”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긴장되어 있다. 다른 파일에서 그는 아지즈에게 자신이 결혼했다고 말한다. 담에겐 새로운 소식이었다.
“이 아지즈라는 사람에게 나는 구체적으로 물어봤어요. 내 아들이 혹시 누구 목을 벤 적이 있는지 아느냐고.” 그녀는 이제 거의 소리지르다시피 하고 있다. “난 알아야 해요!” 전사들은 그녀를 부드럽게 대한다. 그들은 루카스가 폭력과는 분리되어 지냈다고 하고, 담이 기쁜 마음으로 그 말을 믿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전사들, 덴마크 정보국과 이 사실을 확인해 본 셰이크는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리아에서 보낸 마지막 몇 달 동안 루카스는 전사였다.
아들이 시리아로 떠난 후, 담은 늙었다. 살이 쪄서 얼굴이 커지고 비통함에 주름이 잡혔다. 거실 벽난로 선반에 그녀는 정식 무덤 대신에 루카스를 기리는 작은 전당을 만들었다. 가운데에는 ‘어머니 항아리’가 있다. 덴마크에는 손잡이 달린 점토 항아리에 음식을 담아 막 출산한 여성에게 주는 전통이 있다. 루카스가 떠나기 전 점점 급진적이 되어갈 때, 루카스는 담에게 자기 티셔츠의 모든 로고들을 다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 정말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루카스가 죽고 나서 담은 셔츠 중에 빨지 않은 게 한 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직도 그녀의 아들 냄새가 났다. 그녀는 냄새가 날아가지 않도록 비닐 봉지에 넣어서 어머니 항아리에 보관했다.
3월에 전우들에게는 아보 사이프 알 무하지르라고 알려진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IS 전사가 시리아 북부 코바니 외곽에서 머리에 총을 맞았다. 하필 그 주에 그의 어머니 토릴은 루카스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었고, 그녀는 힘을 짜내 페이스북에서 담에게 몇 줄을 적어보냈다. 오슬로에서 남쪽으로 120km 떨어진 강가의 작은 마을 할덴에 있는 토릴의 아파트를 방문한 것은 아보 사이프가 죽은 지 딱 두 달째 되던 날이었다. 그의 어머니에겐 언제나 톰 알렉산더일 것이지만 말이다. 토릴은 내가 만난 어머니 중 가장 최근에 자식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똑같은 일이 그녀의 딸들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구가 작고 이목구비가 섬세한 금발 여성인 토릴은 내게 톰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는 내겐 익숙한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없었다. 그는 톰 알렉산더가 7살 때 헤로인 과용으로 죽었다. 톰 알렉산더는 14살 때 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 진단을 받았다. 20대 초반에는 경범죄로 체포되었고, 점점 더 강한 마약에 중독되며 재활원을 들락거렸다. 한 번은 사망 진단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다 톰 알렉산더는 체육관 라커 룸에서 무슬림의 신앙 고백인 샤하다를 발견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 그는 헤로인을 끊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유치원에 취직하고 참한 모로코 여성과 결혼했다. “새 아들, 좋은 아들이 생긴 것 같았어요.” 토릴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우리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토릴의 딸이고 톰 알렉산더의 이부 여동생인 17세의 사빈이 거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색이 짙은 머리를 길게 길렀고 얼굴은 둥글고 짓궂었다. 헐렁한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2인용 의자에 앉아 씹는 담배를 입술 뒤에 넣었다. 톰 알렉산더가 개종한 이후 사빈의 삶에서의 존재감이 더 커졌다고 토릴은 말한다. 그는 사빈을 오슬로의 자기 아파트에 불러 자신의 새 종교 이야기를 했다. 가끔 28세인 사빈의 자매 사라도 갔다. “그는 이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게 가르쳐 줬어요.” 사빈은 내게 꿈꾸는 것처럼 말했다. 2013년 10월 어느 날, 톰 알렉산더는 사빈을 자기가 다니는 모스크에 데려갔다. 두 여성이 그녀에게 기도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다음 날 그녀는 개종했다.
그 무렵에는 시리아의 전쟁이 뉴스에 요란하게 보도되고 있었고 톰 알렉산더는 난민들을 위한 헌 옷 모으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토릴은 아들에게 시리아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첫 아내와 이혼하고 소말리아 여성과 결혼했다. 그녀는 무슬림 국가로 이주하자고 우겼다. 그 해가 지나기도 전에 그는 어머니에게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2014년 봄, 노르웨이 정보국 PST에서 토릴을 찾아왔다. 토릴에 의하면 그들은 톰 알렉산더가 오슬로의 극단주의 집단인 선지자의 나라 멤버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으며, IS에 가입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고 한다. PST는 어떤 일이든 생기면 전화해 달라고 했고, 그녀는 톰 알렉산더가 가진 것을 전부 팔아치웠다는 걸 알았을 때 전화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무슬림 국가로 떠나기 전에 그런 일을 한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PST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토릴의 말이다.
그녀가 톰 알렉산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14년 6월 26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집에 피자를 만들러 왔다. 수염을 깎고 서양 옷을 입고 있었다. 가족들은 이런 변화를 세속적인 삶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징후로 보고 희망적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다. 하지만 토릴은 이런 것이 젊은이들이 시리아로 가기 직전에 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톰 알렉산더가 시리아에 가기로 하는 일이 생긴다면 막을 수 있도록 정교한 계획을 세워 두었다. 그의 전과와 중독 병력을 사용해 체포되게 할 수도 있었다. 공항에 가서 난리법석을 피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피자 도우를 미는 것을 보며 그녀는 마비된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충격을 받고 겁이 나서, 그 날 일어났던 다른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톰 알렉산더가 그녀의 집에서 나온 뒤, 선지자의 나라 사람들이 그를 차에 태워 공항으로 갔다. 토릴이 옳았다. 그가 수염을 깎고 서양 옷을 입은 것은 유럽식 생활로 돌아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항 보안검색과 출입국관리를 쉽게 통과하기 위해서였다. PST가 그를 지켜보고 있긴 했지만, 그들은 톰 알렉산더가 여권을 발급받고 출국하는 것을 막아두지 않았다. 톰 알렉산더는 며칠 뒤 시리아에서 토릴에게 전화했다. 패닉에 빠진 그녀는 울면서 아들이 시리아에 갔다고 PST에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고맙습니다. 또 다른 용건이 있나요?’라고 했어요.”
톰 알렉산더는 가끔 집에 전화를 걸고 어머니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토릴에게 IS의 수도인 라카에서 트럭을 몬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아파트와 길거리, 자기와 동지들이 로티세리 치킨을 먹는 식당 등의 영상을 찍어 보냈다. 그는 “100% 할랄이에요.”라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가 사빈과 스카이프를 할 때, 사빈은 그가 대화의 초점을 그녀에게 맞추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빈이 파키스탄에 있는 아버지의 가족을 방문했을 때, 톰 알렉산더는 그녀에게 아내감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찾아봤지만 아무도 없더라고요.” 사빈은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하루는 톰 알렉산더가 서 있던 곳에서 45m 거리에 폭탄이 떨어져 아이들이 몇 명 죽었다. “원한다면 보실 수 있게 아이들 사진을 보내 드릴 수 있어요.”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썼다. 토릴은 이 메시지를 소리내어 읽으며 어이없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그녀는 아들이 죽은 이후 처음으로 그들이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스크롤하고 있다. 나는 지금 그걸 읽고 있는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 “아, 아무 느낌도 안 들어요. 난 그냥 마음을 닫아놓고 있어요.” 그녀는 한 손으로 얼굴 앞을 쓸어보인다. 다른 메시지에서 그녀는 참수를 본 적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아뇨. 하지만 잘린 머리들이 굴러다니는 건 봤어요.”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미소짓는 이모티콘을 곁들였다. 3월말, 선지자의 나라의 리더인 우바이둘라 후세인이 토릴에게 전화를 걸어 톰 알렉산더가 죽었다고 했다. 1
우리는 할덴에서 토릴의 발코니에 앉아 파릇파릇한 작은 마을을 내다보고 있다. “나는 행복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했어요.” 큰 선글라스를 쓴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무표정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끔 그녀는 사람들의 말에 어안이 벙벙할 때가 있다. 그녀 아래층에 사는 이웃은 그녀가 나쁜 어머니라고 했다. 그 이웃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라면 양손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너무 괴로워서 뇌엽절리술을 받고 싶은 날들도 있어요.”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에겐 애통해 하고만 있을 여유가 없다. 톰 알렉산더가 떠난 뒤 그녀는 노르웨이 젊은이들을 급진주의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일을 하는 두 무슬림 젊은이에게 전화를 했다. 유세프 바르토 아시딕과 파텐 마디 알 후세이니다. 그녀는 TV에서 보고 그들을 알게 되었다. 톰 알렉산더가 죽고 나서 그들은 가족들을 돕기 위해 아예 같이 살다시피 했다. 사빈은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의 소름끼치는 사진을 본 것이 그녀 안의 어떤 파괴적인 것을 자극했다. 그녀는 학교에서 집중할 수가 없었고 카페테리아에서 식사하는 것이 힘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관심 받는 걸 좋아하지만, 그런 종류의 관심은 아니에요.” 아시딕과 마디는 그녀가 선지자의 나라 리더인 후세인과 온라인 채팅을 자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채팅은 불장난으로 이어졌다.
톰 알렉산더의 추도식 전날 밤, 경찰은 사빈을 심문하고 아시딕과 마디에게 그녀가 후세인과 눈이 맞아 며칠 뒤 함께 달아날 계획이었음을 알렸다. 그들은 할덴 지방 자치제 당국에 도움을 요청해 사빈을 그리스로 휴가 보낼 돈을 얻었다. 오직 그에게서 떼어 놓기 위해서였다. 사라가 후세인을 기소하고 나서야 그는 사빈과의 연락을 끊었다. 아시딕과 마디는 사빈의 여권을 빼앗았다.
사빈이 위험에서 빠져나왔다 싶었을 때, 사라가 선지자의 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6월에 그녀는 선지자의 나라의 대변인 오마르 체브랄과 결혼했다. 체브랄이 국가 안보에 위협적인 존재라 판단되어 노르웨이에서 추방된 직후였기 때문에 식은 스카이프에서 올렸다. 그 둘은 이후 이혼했고, 아시딕과 마디는 사라의 여권도 빼앗았다.
EU의 탈급진주의 전문가인 란스토르프는 내게 이런 것이 드문 현상이 아니라고 했다. 시리아로 넘어간 개종자들 중에는 형제 자매에게 가담을 권하는 경우가 많다. 전사가 죽으면 신병 모집자들은 유가족이 다른 자식을 제공하리라 기대하고 타겟으로 삼는다. 형제 자매들은 죽음에 대처하는 기제로 지하디스트들과 교류하게 된다고 쾰러는 말한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죽음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해주는 것을 찾게 될 수 있고,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지지하는 일이 생긴다.” 한 자녀가 공격적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나면 란스토르프는 “우리는 가족 전체를 치료해야 한다.”고 한다.
여러 어머니들이 급진화될 위험이 있는 자녀를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문제에 상시 사로잡혀 있다. 예를 들어 담은 루카스가 더 건전한 무슬림 정체성을 찾도록 도와주지 않은 것을 자책한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루카스를 태우고 좋은 이맘에게 데려간 다음 차에서 기다렸어야 했어요. 개종자 엄마들은 전부 그렇게 해야 해요. 아이들은 [좋은 이맘과 나쁜 이맘의] 차이를 모르고, 우리는 무슬림이 아니기 때문에 몰라요.”
토릴은 다른 어머니들에 비해 그녀가 목격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톰 알렉산더가 시리아의 전투에 끌린다는 것을 알았고,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정보국에 세 번 전화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발견한 바와 같이,대부분의 서방 국가에서 정부가 개입하게 만드는 것은 충격적일 정도로 어렵다. 란스트로프는 ISIS의 모병 전략은 반응이 느린 서구 관료제보다 훨씬 더 빨리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ISIS는 이제 신병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대 세 군데를 들러서 입국하기를 권하고 있다. 유럽 전사들 일부는 EU의 국경 개방을 악용해 그냥 차를 몰고 불가리아를 지나 터키로 들어간다.
심지어 미성년자들의 경우도 정부들이 시리아 행을 막지 못할 때가 많다. 루카스가 죽은 후 담은 전세계의 아들 딸들(Sons and Daughters of the World)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녀와 정기적으로 이야기하는 덴마크 여성은 미디어에 등장할 때 미리엄이라는 이름을 쓴다. 그녀는 무슬림이고, 그녀의 아들 카림(가명)이 코펜하겐에서 과격한 이슬람교도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을 때 즉시 위험을 이해했다. 그녀는 정부에 위험을 알리고, 카림의 여권을 없애고, 정부에는 카림의 서류에 표시를 해둬서 여권을 재발급 받지 못하게 했다. 당시 17살이던 카림은 그로부터 4개월도 지나지 않아 시리아에 있었다. 그는 부모동의서에 아버지 서명을 위조해 새 여권을 받았다(담은 카림과 루카스가 친구였으며, 그녀에게 루카스가 ‘산산조각 났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카림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ISIS 모병이 워낙 새로운 현상이다 보니 여기에 대한 대처 방법들이 아직 초기 단계라는 것도 문제다. 여러 서방 국가들은 이제야 겨우 지하드 전사 모병을 처벌이나 갱생이 아닌 예방의 차원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토릴처럼 실제로 경고를 하는 부모들은 그저 정보 제공자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출국한 급진주의자를 다시 데려오려고 애쓰는 정부가 많은 것도 아니다. 어느 미국 공직자는 사석에서 내게 미국은 외국인 전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시리아에서 죽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한편 과격화에 맞서는 운동가들에겐 슬플 정도로 자원이 부족하다. 국경 없는 여성들이 운영하는 어머니 학교는 채 1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토릴의 딸을 구한 오슬로의 활동가들인 아시딕과 마디의 조직 저스트 유니티(Just Unity)는 정부 지원금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둘 다 몇 달이나 집세가 밀린 상태다. 란스토르프의 정책 협의회는 아직도 그저 정책 협의회일 뿐이다. 그는 그들의 논의는 마치 ‘사랑의 블랙홀’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는 법률 행위를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시간을 끄는 것밖에 없어요.”
5월의 어느 아침, 체구가 작은 두 여성이 파리의 기차역 가르 뒤 노르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 도미니크 봉과 발레리다. 따스한 봄날 아침이고, 둘 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청바지를 입고 있다. 인파가 그들 주위를 바삐 움직이지만, 두 여성은 열띤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다. 브뤼셀에서 온 기차가 도착하고, 두 사람은 곧 살리하 벤 알리가 사람들 속에서 작은 수트케이스를 끌며 걸어오는 걸 본다. 세 여성은 오랜만에 만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처럼 폭발적인 애정을 보인다. 그 날 하루 동안 세 사람은 여러 카페들을 돌아다닌다. 이야기하고, 커피와 모히토를 마시고, 끊임없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 함께 한다는 안도감은 대단했다.
다른 어머니들과 있을 때면 설명해야 하는 것이 많지 않다. 다 알기 때문이다. 토릴과 담은 둘 다 여행할 돈이 없어서 만난 적이 없지만 페이스북 메신저와 스카이프로 쉴새 없이 이야기한다. 토릴에게 있어 담은 전문가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경험해 봤고, 내가 앞으로 어떤 느낌이 들지 미리 말해줘요.” 토릴의 말이다. 부드로 역시 이런 인터넷 상의 모임에서 위안을 얻는다. “우스워요. 카롤리나나 다른 어머니들과 내가 스카이프로 이야기하면, 무슨 얘기가 나오면 어느새 전부 다 울고 있어요.” 그녀는 그런 대화는 “우리가 아직 인간”인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봉, 벤 알리, 발레리는 깊은 우정을 형성했다.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날 일이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툴루즈에서 온 60세의 퇴역 군인인 봉은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고 강렬한 푸른 눈을 지녔다. 그녀는 아들 둘을 ISIS에 잃었다. 그녀의 아들 니콜라와 양아들 장 다니엘은 2013년 3월에 도망쳐 시리아로 갔다. 장 다니엘은 8월에 22세의 나이로 죽었고, 12월에 봉은 30세였던 니콜라가 죽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홈스에서 폭발물을 실은 트럭을 몰고 건물에 돌진한 모양이었다.
초콜릿색 눈으로 비통함을 발산하는 통통한 벤 알리는 무슬림이지만 패러슈트 팬츠를 입고 있고 머리카락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의 네 자녀는 모두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나는 이슬람교 실천은 조용하게 해요.” 그녀와 내가 올해 봄에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차남 사브리에겐 조용한 실천만으론 부족했다. 2013년 8월, 그는 말없이 집을 떠났다. 나흘 뒤 그는 페이스북으로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나 시리아에 왔어요. 우리는 천국에서 함께 할 거예요.” 그녀는 몇 달 동안이나 사브리를 설득하려 애썼다. “지하드가 되려면 7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내가 보기에 시리아의 전쟁은 지하드가 아니에요…… 그건 내전이죠.” 그녀는 무슬림 신학을 사용해 세뇌를 뚫고 들어가라는 쾰러의 조언에 따르며 꾸준히 노력했다. 그러나 사브리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브리가 죽고 나서 브뤼셀의 벤 알리의 무슬림 이웃이 찾아와 “당신 아들은 순교자입니다. 이제 문을 닫고 아들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마세요.” 그녀는 절대 사브리 이야기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고, 그 이웃은 그녀와 완전히 절연했다.
성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발레리는 내가 만난 어머니들 중 유일하게 아직 자녀가 살아있다. 그녀의 18세 딸 레아(가명)은 알레포 어딘가에 살고 있다. 레아는 16살 때 발레리 모르게 22세 알제리 남성을 만났다. 그는 레아를 개종시키고 급진주의자로 만들었다. 2013년 6월 5일에 레아는 저녁을 먹고 어머니를 껴안고 키스한 다음 집에서 나간 뒤 사라졌다. 발레리는 레아가 납치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레아와 그 알제리인은 결국 시리아로 갔다. 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발레리의 마음은 동물적 욕구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하다. 그러나 그녀는 레아가 어떤 면으로는 더 이상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통화할 때, 왓츠앱으로 문자를 보낼 때의 그녀는 세뇌된 로봇 같다. 열 달쯤 전에 레아가 아들을 낳은 뒤로는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가끔 발레리에게 육아 조언을 구하고, 발레리는 이제 레아도 어머니가 되었으니 자신을 더 잘 이해할 거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레아와 아기를 어찌어찌 구할 수 있다 해도, 레아를 정상적인 생활로 완전히 돌아오게 할 가망은 거의 없다는 걸 발레리는 알고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는 그녀를 무척이나 힘들게 한다. “만약 내 딸이 죽었다고 했다면 더 편했을 거예요.” 발레리는 울면서 말한다.
그러나 이 어머니들이 그 날 오후 파리에서 나누고 싶었던 것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의 행동주의와 끝없는 미디어에 대한 연구 이야기였다. 어떤 기자들을 만나기로 했고, 어떤 기자들을 피해야 하는지 같은 것들이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이나 집을 침범한 TV 취재팀을 묘사하며 가족들에게 매번 촬영 때마다 협조해 달라고 설득하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고 했다.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욕설을 들었고, 부모로서 실패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행동주의가 현실 대처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매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들은 인생 최악의 경험에 다시 푹 빠지게 된다. “하루 24시간 동안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요. 이렇게는 못 살아요.” 발레리가 신음했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이 떠난 이래, ISIS는 이 어머니들의 우주가 되었다. 그들은 시리아 지리와 4년에 걸친 내전의 파벌들에 대한 전문가이고, 지하드의 언어에 능통하다. 이 젊은 남녀가 시리아에 갔을 때 그들의 어머니들도 함께 갔다. 어떻게 가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ISIS의 소셜 미디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것 이상의 일을 수반할 때도 있다. 올해 봄, 벤 알리와 다른 두 어머니는 시리아로 건너가려고 시도했다. 아들들이 인생 최후의 몇 달 동안 무엇을 보았는지 목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국경에서 터키 당국에 의해 저지당했지만, 벤 알리는 시리아 난민들의 비참함을 보니 왜 아들이 그녀를 떠났는지에 대한 통찰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 나는 내 아들이 대단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녀의 탐구는 드문 것이 아니라고 란스토르프가 말한다. “터키에서 자기 아이들을 찾거나, 직접 시리아로 가는 부모들이 많아요 … 심지어 IS에 구금된 부모들도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어떤 어머니도 그만둘 수가 없다. 그만둔다는 것은 다른 어머니들의 아이들이 급진적인 이맘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자살 폭탄 테러범이 되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둔다는 것은 자기 자녀와의 연결을 끊는다는 의미다. 행동주의를 통해, 끝없이 답을 찾는 탐색을 통해 그들 개개인은 자신의 아이를 살려놓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냈다. 어떤 심적 대가가 따른다 해도 말이다. 담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아주 잠깐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녀의 옛 삶과 비슷한 짧은 순간이다. 그러고 나면 “나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완전히 새로운 세계 안으로 끌려들어가요.”라고 담은 말한다.
부드로는 사무실 겸용으로 쓰는 좁은 부엌의 식탁 앞의 높은 스툴에 앉아 있다. 시리아의 ISIS에 가담하기 위해 앨라배마에서 집을 떠난 호다라는 젊은 여성의 아버지 와 통화하고 있었다. 부르도는 호다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어떻게 준비했는지 아버지가 설명하는 것을 주의깊게 들었다. 요르단은 공습 강도를 높였고, 호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당신을 도울 수 있도록 여기 있고 싶을 뿐이에요.” 부드로는 연민이 깃든 목소리로 말한다. “하다못해 당신이 그냥 소리지르고 울고 외치고 싶을 뿐이라도요. 아니면 도움과 카운셀링을 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찾고 싶다면 말만 해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게요.”
통화후에 부드로는 10분 시간을 내서 저녁에 먹을 토마토 수프 몇 캔과 스파게티 면 몇 팩을 슈퍼마켓에서 사왔다. 그리고 부리나케 마을 반대편으로 가서 양녀 페이지를 학교에서 데려왔다. 우리가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부드로는 울면서 휴대 전화로 BBC와 긴 인터뷰를 했다. 키가 크고 안경을 쓴 소녀 페이지가 뒷자리에 탔을 때도 부드로의 목소리는 잠겨 있고, 페이지가 쏟아놓는 수다에 다른 일이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대답했다. 탈급진주의에 주 예산을 배정 받으려 노력하는 에드먼튼의 소말리아인 커뮤니티 대표들과 컨퍼런스 콜을 하기 전에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저녁을 먹여야 했다. 그리고 짐도 싸야 했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몬트리얼 지역 방송 토크 쇼에 출연해 작년 10월에 캐나다 의회에서 총기를 난사한 젊은 남성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했다. 부드로는 스파게티를 불에 얹고 다른 프레스 콜을 하러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뤼크와 친구가 커다란 빨간 슬러피를 들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뒤뜰에서 법석을 피웠고 페이지는 무기력하게 TV를 보았다. 스파게티는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계속 끓었다.
내가 스파게티를 건지려는 찰나, 부드로의 파트너인 마이크가 지역 건설 현장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먼지 투성이이고 녹초가 되어 있다. 집에 와 있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는 집에서 저널리스트를 발견한 게 절대 처음이 아니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그에게 나와 이야기를 나눠주겠느냐고 물었다. “아, 난 그 얘기는 하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나만의 비누방울 속에서 살아요.” 그는 맥주 하나를 따고 자리를 떴다.
부드로는 생각에 잠긴 채 급히 스파게티 한 접시를 먹었다. 함께 먹던 마이크와 페이지에게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소파로 가서 소말리아인들과 컨퍼런스 콜을 했다. 그녀의 얼굴은 밝아졌고, 웃음과 흥분으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는 갑자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페이지와 마이크는 가끔 속삭인 것을 제외하면 통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계속 조용히 먹었다. 그리고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살금살금 나갔다.
쾰러는 부드로가 ‘사전 대비하는 방식으로 그녀의 상처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녀는 자기 가족이 아닌 죽은 아들을 선택한 셈이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이 아닌 다미앙의 세계에서 보내고, 그들의 삶에는 그에 따른 현실적인 영향이 미치고 있다. 그녀의 회계 일도 줄어들었다. 전업으로 일을 할 수 없는데, 그녀는 ISIS 전사의 어머니로 대중 앞에 나선 탓이라고 한다. 행동주의는 경제적 부담을 계속 가중시키고 있다. 그녀가 5월과 6월에 낸 전화요금만 1천 달러가 넘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의 아들의 죽음은 아직도 가족들에게 천천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년 여름, 다미앙의 13세 이부 여동생 호프는 자기 아버지와 살기 위해 떠났다. 호프는 부드로에게 12개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뤼크는 세라피를 받고 있고 적응 장애 진단을 받았다. 키가 작고 금발 머리가 부스스하고, 재빠르고 영리한 눈을 지닌 뤼크는 학교에서 외면받는 느낌이 든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그 얘기를 너무 많이 하고, 너무 부풀린대요.” 가끔은 이집트에 4년 있다가 돌아오겠다고 새끼 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을 어긴 다미앙에게 화가 날 때도 있다. 가끔은 같이 레슬링을 할 때 형한테 너무 거칠게 했던가 생각하며 자기 탓을 할 때도 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때는 잘 때예요.” 뤼크의 말이다.
그 날 오후 부드로의 집 테라스에 함께 앉아 담배를 피울 때, 그녀는 다미앙은 자기가 잃은 첫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2001년에 당시 1개월이던 호프의 쌍둥이 형제가 유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그 일로 인해 부드로는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고, 다미앙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 그녀의 아이 중 두 명은 죽었고 한 명은 그녀에게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와 파트너 사이의 관계도 불안정해지고 있다. “마이크는 행복하지 않아요. 그에겐 너무 지나친 일이죠. 그는 내가 행동주의를 그만두길 원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해요.”
부드로가 그녀에게 닥친 모든 일들의 거대함에 압도되는 밤들도 있다. 그런 밤이면 다들 자는 동안 부드로는 교외 가족 생활의 흔적이 가득한 자기 차에 타고, 다미앙이 조수석에 앉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미앙에게 소리를 지른다. 다미앙이 그녀의 가족에게 한 일, 그녀와 뤼크를 파괴한 일, 그녀는 여기 남아서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쳐야 하는데 다미앙은 죽음의 평화 속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위해 강한 척하던 모습을 버리고 운다. 다 풀릴 때까지 울고 나면 그녀는 2층에 올라가 마이크 옆에 누워 뤼크처럼 잠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내일은 매체 인터뷰, 전화 통화를 하는 또 하루의 날이다. 다미앙이 그녀를 위해 선택해 준 삶을 사는 또 하루의 날이다. 그녀는 담배를 빨고, 눈을 찡그리고 늦은 오후의 태양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내가 지금 아는 것들을 예전에 알았더라면, 난 아이들을 절대 낳지 않았을 거예요.”